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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칼럼] 젊은이들이여 생각해 보자 1-4] - 언제나 한 발 앞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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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6-13 18: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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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 이신 김용기 선생님의 1979년 저서"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약 40년이 지난 글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참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명 있는 것으로서의 전통 역시 이 원칙에 벗어나지는 않는다. 전통은 부단히 생성하며 발전하며 그리고 비약하면서 다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의 계승자란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유산을 유지 보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유지보전과 동시에 그를 더욱 육성 발전시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전통의 계승자란 동시에 스스로 창조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이다. 모든 문화민족은 각자가 하나의 전통 옹호자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창조자가 되어야 한다. 스스로 창조자가 되지 못한 자는 선조에 대해서나 후손에 대해서나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살아 있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 했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어느 점에 있어서는 전통의 파괴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이는 흔히 혁신, 혁명 또는 우상파괴라는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전통이 너무 오래 계승되다 보니 그를 유지하는데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는 수가 있다. 가령 오천년 동안 우리의 생활규범이 되다시피 한 유교의 예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유교에 있어서 공자는 예를 가장 숭상하였다. 왕도사회에 있어서는 법률보다 오히려 예로써 치도의 근본을 삼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야말로 문화인과 야만인을 구별하는 척도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예제가 지나치게 복잡하고 번거로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력자가 약자를 그로써 속박하는 것이 된다면 인류가 만들어낸 문화가 오히려 인류를 압박하는 도구가 되고 만다. 유교가 오늘날 우리의 일상생활을 그릇 인도한 예가 이뿐이 아니다. 그 예를 여기에 모두 들 수는 없다.

성신 여자사범대학의 김선양 교수가 그 병폐의 몇 가지를 가장 요령있게 지적하였기에 그 대강을 여기에 간추려 보기로 한다.

첫째, 유교의 보수사상에 대하여, 보수사상이란 현상유지를 좋아하고 변화를 싫어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과거를 바탕으로 하여서만 가능해진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임금 중에서는 요순 임금이 제일이고 태평세월의 때가 제일이라고 하는 과거에만 집착한 것이 유교의 생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유교의 보수사상이 현재 우리 나라가 새로운 혁신을 하는 데 큰 장애가 되어 있기도 하다.

둘째, 충효사상에 대하여, 유교의 본뜻은 충효사상인데 그 둘 중에 더 중요한 것을 효로 하고 있다. 왜냐하면 충은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를 말하나, 효는 어버이와 자식간의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 임금은 하늘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하늘의 명령이 없는 임금은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버이와 자식간의 효는 뒤집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어버이나 자식간에 절연을 하라고 해도 부자와 모자지간의 사이는 숙명적이고 운명적이기 때문에 충에서 보는 것과 같이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땜누에 효의 개념이 충의 개념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가족단위의 이기주의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대가족제도는 때로는 국가의 총화를 해치는 폐단도 있어 왔다.

셋째, 사대사상에 대하여, 외국에서 문물을 들여올 때 사상과 철학, 문학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 양식이 따라 들어오기 마련인 것으로 선택 없이 도입될 때 이것이 바로 사대사상이다.

네째, 관존민비사상에 대하여, 중앙집권제도가 너무 강하게 되면 관존민비의 사상이 싹트게 된다. 우리나라는 지형적으로 보아서 중앙집권제도가 강하게 작용했는데, 여기에서 과논민비사상이 나타났다. 그런 사상 때문에 지금도 자식을 낳아서 공부를 시켜 육체노동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정신노동만 시키려 한다.

다섯째, 유교의 윤리에 대하여, 유교의 윤리는 하라는 것보다 하지 말라는 것이 더 많다. 윤리 중에는 긍정적인 윤리와 부정적인 윤리로 구분하는데, 부정적인 윤리는 소극적인 윤리요, 긍정적인 윤리는 적극적인 윤리이다.

긍정적인 윤리와 부정적인 윤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윤리를 강요하지 않는 유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 국민들의 사고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반공은 부정적인 표현이며 승공은 긍정적인 표현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지 말라는 말보다 하라고 하는 적극적 지도를 해야 한다.

끝으로, 비실용성이 많은 점에 대하여, 유교의 이기설 때문에 당쟁이 있었고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다.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이론과 이념에만 집착을 해서 사회에 해만 끼쳤는데, 지식은 현실에 적응해야 한다. 지식은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에 유용성의 문제를 더욱 연구해야 한다.

 

 

김용기 선생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지마라는 말보다는 하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의 농부로서 우리의 인생을 경작할 때 하지 말자, 해도 안돼, 라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정신의 지배를 받지 말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해보자는 정신으로 우리의 인생을 위해 일하는 농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맺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신은 말을 지배하고 말은 곧 사람의 행동양식을 통제하게 됩니다. 따라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정신을 갖고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때 현실에서 우리의 꿈과 이상을 실현 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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