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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칼럼]젊은이들이여 생각해 보자 2-11 – 나는 이렇게 살아왔고 살아간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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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09-06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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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농군학교의 설립자 이신 김용기 선생님의 1979년 저서"이렇게 살 때가 아닌가"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약 40년이 지난 글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참 진리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셋째 희생, 이는 봉사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와 아주 다르다. 봉사는 협동의 마음으로 너와 나와 함께 잘 살자는 의미이지만, 이 희생은 상대만을 위해서 나를 멸하는 사상으로써, 아가페의 고도한 사랑에서 나온다. 그 사랑은 곧 예수님의 사랑이다. 자기를 희생함으로써만이 실현되는 것이며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사랑인 것이다. 본래 사람에게는 누구에나 이 사랑의 마음이 있는 것이지만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은 이 사랑에 제일 가깝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사랑도 단지 동물적인 사랑에 그치고 마는 수가 많다. 자기가 낳은 분신으로서의 사랑에 그칠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사랑 즉 하나님이 보내준 아기를 맡아 기른다는 생각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사랑, 동포사랑, 나라사랑이 다 이 사랑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단지 동물적으로 내 새끼니까 사랑하고, 단지 귀여우니까 사랑하는 것, 그것은 희생의 정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랑이다. 그건 동물들도 다 하는 사랑이 아닌가. 사람의 사랑은 하등동물의 사랑과는 달라야 한다. 더 큰 사랑이라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지상명령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희생, 즉 남을 위하여 자기를 멸하는 것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와 보상은 하나님이 주신다. 이에 대한 대가나 보상은 근로나 봉사로 얻은 그것보다 몇 백배 몇 천배나 더 크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 표본이다. 예수님 한분의 희생으로 온 인류가 멸망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 얼마나 큰 보상인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지상에 보내어 우리의 죄만을 사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희생정신을 우리 일상생활에도 적응하도록 가르쳐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배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의 희생적인 사랑은 온 가족이 기뻐한다. 아버지가 하루 품팔이를 해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면 온 가족이 기뻐한다. 아버지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다족을 위해 하루 희생당한 것을 억울해 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이장(里長)이 밤잠안자고 마을을 위해 일하면 마을 사람들이 기뻐한다. 그 이장은 그것으로 만족한다. 대통령이 불철주야 나라 일을 걱정하고 백성을 위해 일한다면 온 국민이 기뻐한다. 그때, 그 밤잠 안자고 희생단한 것을 억울해 할 대통령이 있겠는가? 그보다 더 큰 만족감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 보상인가? 진실로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그 가족을 위해 죽을 수가 없겠는가? 마찬가지로 진실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를 위해 죽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희생에는 더 큰 보상이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안중근(安重根)의사는 우리 민족의 숙적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윤봉길(尹奉吉)의사는 적장 백천의일(白川義一)을 죽이고 죽고, 이봉창(李奉昌)의사는 일본 천왕에게 폭탄을 던지고 죽었다. 그것은 모두 희생이다.그러면 거기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었는가? 한 몸의 희생으로 온 민족의 원한을 푼 보상이 있었다. 그뿐인가? 온 민족에게 애국심을 불어 넣어주고 적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킨 것이다. 그뿐이랴? 급기야 온 국민은 왜적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고 민족 만년의 새 길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런 사랑이 없는 사람은 그런 큰 보상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으며, 그런 사랑이 없는 민족은 번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참 사랑의 표현이 곧 희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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